보스도 관리자도 없는 회사, Valve

2006년대 10월 SK텔레콤은 대리, 부장과 같은 기존의 직급들을 없애고, ‘매니저’ 하나로 통합하는 조직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오랜 시간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던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를 파괴해, 조직 내부의 창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SK텔레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을 전후로 많은 사기업과 공기업들이 앞다투어 직급제를 철폐했고, 이를 통해서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가는 글로벌 경쟁을 버텨낼 조직 문화의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 현장의 중심에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조금 못 미치는 동안 사회 문화적 변화와 맞물려 기업 문화도 상당히 자유로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예전처럼 윗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시절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국내 기업들이 직급제를 폐지한 것은 그 시절 미국식 경영을 따라가던 흐름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겪은 가장 큰 경제적 사건 중 하나인 IMF 구제 금융 그 시절, 평생 직장의 개념이 깨지며 성과를 최우선으로 하는 연봉제가 도입된 것이 흐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평적 조직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성과 중심의 조직’. 20년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우리 기업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서구의 기업들과 매우 유사한 조직 마인드와 체계를 갖추게 됐습니다. 물론 사회 문화적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미묘하게 다른 무엇이 있지만 겉모습은 유사한 점이 많은 듯 합니다. 이렇게 변화를 거듭하는 사이, 우리는 드디어 성과 중심의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과를 이끌어 내는 핵심 동인인 ‘창의성의 극대화’를 조직의 최우선 목표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앞선 이야기에서처럼 SK텔레콤이 직급 체계를 파괴한 것은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이 가진 잠재된 창의성을 조직 내에서 발현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위의 차별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일상화하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끄집어 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고, 그의 생각과 감정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내 생각과 느낌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 구성원들에게 완전한 자유와 권한을 부여하는 시도를 통해서는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과연 보스와 관리자가 없이도 일이 진행되고 뛰어난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Valve(Valve Corporation;밸브)라는 회사를 통해 몇 가지 의문에 관한 답을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직원들의 직급 체계만을 버렸지만, Valve는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계획과 성과가 관리되는 방식을 포기했습니다. 보스와 관리자가 없는 완전한 수평 조직 구조를 통해 성과와 창의성 중심의 회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Valve Corporation 엿보기

Valve는 Microsoft에서 근무했던 Gabe Newell과 Mike Harrington이 1996년 창업한 게임 개발 회사입니다. 자신들만의 제품들을 만들어 팔기도 하지만, 다른 개발사들이 만든 제품을 Steam이라고 하는 선도적인 배급 플랫폼을 통해 유통하기도 합니다. 자체 개발한 Half-Life, Team Fortress, Counter-Strike, Portal 등과 같은 걸출한 성공작들과 더불어 2010년 기준 1,400개가 넘는 타이틀을 유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게임 회사입니다. 회사와 관련해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지만, 2012년 경 NC소프트와 넥슨이 Valve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의 추정 Market Cap.은 약 3조원 내외였고, 지금은 그때의 성과를 넘어 서고 있어 대략적인 기업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Valve는 보스와 관리자가 없는 완전한 수평 조직 구조를 지향

Valve는 게임 시장에서 이뤄낸 뛰어난 성과 못지 않게 독특한 기업 문화로도 유명합니다. 짧게 정리하면 ‘완전하게 수평인 열린 조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창업자이자 대표인 Gabe Newell과 몇 명의 임원들이 있지만 보스나 관리자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회사에는 명시적인 관리자와 보스가 없고, 정형화된 조직 구조 자체도 없습니다. 그저 구성원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모여 팀을 꾸리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정리하고 나눠서 진행하는 방식만이 존재합니다.

이런 조직 문화의 특징 때문에 Valve의 책상들에는 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 수평 구조이기 때문에 아무도 일을 시키거나 참여할 프로젝트를 지정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바퀴 달린 책상을 밀어 자리를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스스로가 프로젝트를 만들고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해 책상을 끌고 오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회사는 모인 사람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역할에만 집중합니다. 이런 업무 방식은 개발 뿐만 아니라 사업, 채용, 세일즈, 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렇게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팀을 Valve에서는 Cabals라고 부릅니다. 앞서 일을 지시하거나 관리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개발 프로젝트의 특성상 일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협업자들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Valve의 조직 구성원들은 팀을 모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Team Lead를 선정하여 팀을 돕도록 합니다. 그리고 Team Lead는 팀 구성원들과 팀 외부와의 의사소통을 중계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실수와 실패가 용인되는 조직 문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조직 문화와 구성이 가능 하려면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범위가 대폭 확장돼야 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실수와 실패에 관련된 자유입니다. 회사는 공개적으로 실수나 실패를 해도 해고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실패를 하는 것에도 자유가 있어야 자유로운 분위기와 조직 문화가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오랜 시간의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확신을 심어 주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동료 리뷰 그리고 스택 랭킹

이와 더불어 성과에 대한 납득 가능한 평가와 보상을 해 구성원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고 있습니다.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되며, 순수하게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평가 방식의 첫 번째 방법은 동료 리뷰입니다. 일년에 한 번씩 서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것으로,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대상 직원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분석해 개개인에게 전달합니다. 내용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며 직설적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스택 랭킹(Stack Ranking)입니다. 직원들이 가진 기술적 수준과 능력, 생산성과 결과물, 그룹 기여도, 제품 기여도 측면에서 점수를 부여하고 순위를 매기는 방식입니다. 평가 그룹이 모여 평가 결과를 결정짓고 등급의 결과만 인사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보상은 이 등급의 결과에 따라 결정됩니다.

관리가 전혀 없는 극단적인 조직 형태로 회사를 운영하지만 뛰어난 성과를 내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평가 부분입니다. Valve는 구성원이 서로를 평가하여 동료들을 칭찬하고 질책하며 보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평가 대상이 되는 하나의 그룹을 업무적으로 연관된 두 개의 그룹이 동시에 평가하고, 그 결과를 익명이지만 직설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Valve에 따르면 지금까지 각 평가 그룹 간의 결과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장단점과 성과를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업종과 조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채용

뛰어난 성과의 또 다른 핵심에는 인력 채용이 있습니다. Valve만의 특별한 채용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채용의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확고하고, 성과를 내는데 필요한 인재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Valve는 채용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채용과 관련된 일은 그들의 주업인 개발보다 우선합니다. 만약 면접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면 하고 있던 개발 업무를 바로 중단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력서를 검토하고, 회사가 필요한 사람인지를 고민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특히나 면접자가 T자형 인간이라면 더 눈여겨봐야 합니다. T자형 인간은 다방면에서 수준 높은 기술을 가지고, 그 중 한가지 분야에서는 최고라 불릴만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이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성과를 내야 하는 Valve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Valve는 완전히 열린 수평적 조직 구조를 실현하고 그와 동시에 큰 성과를 창출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회사가 됐습니다. 게다가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성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Valve가 다져온 조직 문화의 특성이 창의성을 극대화하는데 매우 적합하고 게임이라는 산업적 특성에도 잘 맞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성과를 극대화하는데 적합한 평가와 보상 시스템이 수평적 조직 구조가 실패할 가능성을 줄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Valve에 꿈의 직장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이도록 해 주지만, 성공 이면에 가려진 문제점 역시 존재합니다.


수평 구조의 어두운 면

Valve는 일하기 좋은 천국과 같아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은 완전에 가까운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이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Valve의 조직 문화와 시스템이 천국처럼 느껴질 구성원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피로사회를 저술한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영악함은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지금 시대의 가장 큰 문제다.”

Valve는 구성원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직원들 스스로 많은 것을 해결해야 하는 큰 짐을 던져줬습니다. 직원들은 예상되는 생산성 이상 것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업무 이외에도 많은 것을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또 정형화된 조직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이 아닌 비공식적인 채널을 개척하고 선점해야 합니다. 게다가 회사는 서로를 평가하도록 하고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웁니다. 자존감과 성취욕이 강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매몰차게 몰아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꼴찌가 된다면 해고되지는 않겠지만 퇴사를 고민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시장의 경쟁자와 싸우는 데 좀 더 시간을 쓰기보다는, 회사 안에서 나 자신 그리고 구성원들과 경쟁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2013년 초 하드웨어 개발자 30명 정도가 해고돼 Valve를 떠났습니다. 그 중 리더 격인 Jeri Ellsworth가 Valve를 떠나며 남긴 이야기는 완전한 수평 구조가 갖는 문제점들을 잘 설명해 줍니다. 대화를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많이 어려웠고, 인기가 없었던 자신의 프로젝트에서는 사람들을 모으거나 채용하는 것마저 힘들었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중요한 의사결정마다 은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관리층이 존재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Valve의 구성원 모두에게서 다 다르게 평가될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가 수평 구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인식하는 정도가 모두 다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두가 같기를 바라고 그것을 강요한다면 회사는 마치 폐쇄적이며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반사회적인 종교 집단과 같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1) HANDBOOK FOR NEW EMPLOYEES, 2012, Valve Corporation

2) Valve Corporation, Wikipedia
3) Valve’s ‘perfect hiring’ hierarchy has ‘hidden management’ clique like high school, July 8, 2013, Michael French
4) Valve’s Gabe Newell Is The Newest Video Game Billionaire, Mar 7, 2012, Forbes
5) A Glimpse At A Workplace Of The Future: Valve, April 27, 2012, Forbes

4 thoughts on “보스도 관리자도 없는 회사, Valve”

  1. 장점에 치우친 ‘칭찬’ 일색의 글이 아닌, 단점까지 같이 조명한 균형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년 Forbes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는 ‘Workplace of the Future’, ‘미래지향적’이라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수평적인 기업문화 실험도, 약 1년 후 개발자 30명이 해고된 것과 Jeriworth의 설명에서 볼 수 있듯 성공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군요.

    ‘관리자 (Manager)’라는 직책이 괜히 생기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Jeriworth가 Valve를 일진과 왕따가 존재하는 ‘고등학교’에 비유한 것이 무척 재밌네요.
    (http://www.wired.com/2013/07/wireduk-valve-jeri-ellsworth/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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