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일과 성공에 관한 꿈이 많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사이트를 시작하며 이름을 조금 알렸던 약 15년 전에도 그랬고, 한참 의욕에 넘치던 사회 생활 초년기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감과 좌절감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힘겹게 제 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초라한 제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사실 이제는 그 꿈이 무엇인지조차 가물가물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은 짙은 안개 속에 놓은 이정표처럼 흐릿해지고, 못난 제 자신을 탓하는 좌절감만 희뿌연 안개처럼 짙어져 갑니다. 점점 더 짙어져 갈수록 더디고 비겁한 제 자신을 질책하고 또 채찍질합니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외치면서. 정말 저는 잘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오래 전 이와 비슷한 문제로 제가 좋아하는 직장 선배에게 답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결과 밖에 남은 것이 없어요.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배는 고민이 많고 정신적으로 지쳐갈 때면 좋은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어 보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내면 저편에 쌓여있던 긍정과 희망의 힘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말이죠.

효과가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제 자신 속에 감춰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커다란 힘과 같은 무엇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제 모습은 언제나 초라했습니다.

세상은 항상 저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저는 그것을 믿어 왔고, 부족한 제 노력과 의지를 탓하며 자책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책은 좌절감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제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할까요? 적지 않은 노력을 일과 삶에 쏟아 붓고,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정말 못나서일까요?

약 2년 전쯤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책 한 권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일로 한참 지쳐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매우 작고 얇은 책이었음에도 짧은 제목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두운 자화상, 피로사회

현대 사회에 만연한 긍정 과잉과 이로 인해 스스로를 생산성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해 낸 책, ‘피로사회’였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책은 읽는 동안 작은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후, 저자인 한병철 교수(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는 한국 방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영악함은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지금 시대의 가장 큰 문제다.”

책은 긍정 과잉의 시대를 탐색하기 위해, 지난 세기로부터 변화해 온 사회 병리 현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전 세기에서는 없었던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등의 신경성 질환이 만연한 현대 사회의 이면에서 ‘성과 중심’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이전 시대는 자아와 타자의 부정성 즉,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한다’를 내세워 타인을 착취하던 시대였습니다. 자동차 회사 포드가 포드 시스템(Fordism 그리고 Ford)을 도입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성은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무너뜨리며,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자본주의 시스템은 진화를 거듭했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과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타자’의 존재와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아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성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고.


마치며,

한병철 교수는 일관되게 ‘자기 착취’의 문제점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타자’와 ‘타자에 의해 강요된 긍정성’에 좀 더 주목해야 하지는 않을지 저자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이에 더해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도 구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과에 모든 것을 걸고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우리에게 허를 찌르는 자각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많이 일하고 더 큰 성과를 내면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됩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기대어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죽도록 일하고 그래서 죽을 만큼 피로해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인가요, 아니면 노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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