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모든 것, 스와치

스위스를 생각하면 정답처럼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만년설로 뒤덮인 알프스와 영세중립국, 비밀을 보장하는 개인은행 그리고 초정밀 기계산업. 특히 스위스는 고급 시계가 유명하다. 수십 년 동안 오직 손으로만 시계를 만들어 오고 있는 장인들의 모습에선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이다.

아직까지도 30여명 남짓한 직원들이 모든 부품을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드는 공장들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예술적 가치는 높지만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던 200년 스위스 시계 역사에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시작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시계산업의 위기

변화는 위기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위기는 경제 대공황과 함께 시작됐다. 대부분 가내 수공업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스위스 시계산업에 경제 대공황은 치명적인 위기를 안겨 주었다. 문을 닫는 공장과 실업자가 늘었지만 뛰어난 브랜드들은 스위스 시계산업의 양대 축인 ASUAG와 SSIH에 흡수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위기가 가실 무렵인 1970년대, 두 번째 위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강력한 경쟁자가 문제였다. 급속한 산업화를 이룬 일본이 저렴하며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전자기술을 바탕으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 시계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던 스위스는 74년 9천1백만 개에 달하던 생산량이 83년 4천3백만 개로 줄어들어 시계 강국으로서의 자존심에 심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대공황보다도 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스위스 시계산업이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고 ASUAG와 SSIH는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두 기업의 주 채권단은 Nicolas Hayek가 이끌던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에 자문을 의뢰했다.

얼마 후 스위스 시계산업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분석한 ‘하이에크 리포트’가 채권단에 전해졌지만 수용되기 어려운 요구들이었다. 스스로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하고 있던 최고급 시계의 이미지를 버리고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중저가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가내 수공업 방식과 스위스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할 수 없었다.


스와치 그리고 헤이에크

결국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일본계 기업들이 ASUAG와 SSIH를 인수하려 시도했고 일본과 홍콩, 그리고 미국의 저렴한 시계가 세계를 휩쓸었다. 스위스 시계의 역사가 끝날 듯 보이던 그 무렵, 자신의 생각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하이에크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몇몇 투자가를 설득해 ASUAG와 SSIH를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 Swatch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이는 스위스 시계산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ASUAG와 SSIH를 인수한 헤이에크는 스위스의 수많은 브랜드들을 흡수하며 SMH 그룹 – 1999년에 이르러 Swatch로 사명을 변경하게 된다 – 을 설립하고 공격적이며 혁신적인 움직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저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대량 생산 체계를 만들고 기술 혁신을 통해 저가격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통합과 시스템 혁신을 통해 경쟁국들과 동등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 스와치는 또 다른 핵심 경쟁력을 찾아 나섰다.


시계는 패션이다

일본, 홍콩, 미국은 진보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값싸고 실용적인 시계를 선보이며 기존 시계시장을 잠식해 갔다. 80년대 전자시계는 아날로그 시계의 종말을 예견하는 듯 보였지만 스와치는 새로운 개념을 시계에 도입, 시장을 창출해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시간을 보던 기계였던 시계가 패션의 일부가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두 번째 집인 별장은 가지면서 왜 두 번째 시계는 갖지 않는가”라는 스와치의 카피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시계가 그 기능을 상실해 감에 따라 스와치의 전략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차지 않았다. 자신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고 권위와 지위를 표현하기 위해 시계를 차기 시작한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스와치가 됐다. 사람들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옷을 사고 구두를 사듯이 스와치를 샀다.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하라

시계를 패션의 일부로 바꾸어 버린 스와치는 시장 확대를 위해 고객의 폭을 크게 넓히기 시작했다.‘스와치’라는 단일 브랜드만으로는 모든 계층의 고객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스위스 시계가 가지고 있던 정밀 기술과 고급 이미지 그리고 새롭게 구축한 대량 생산 시스템은 스와치의 시장 다변화를 가속화했다.

저가 브랜드인 Swatch를 기반으로 중가 브랜드인 Tissot, 고가 브랜드인 Omega, 초고가 브랜드인 Blancpain이 스와치 그룹의 브랜드 계층을 형성하게 됐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시계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스와치가 곧 시장이 되었고 14개에 달하는 스와치의 브랜드들은 독자적인 고객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 개성에 따라 스와치의 브랜드를 결정하고 시계를 차면 브랜드가 됐다.


스와치, 성공의 핵심

이렇게 스와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브랜드 창출과 혁신적인 생산 시스템에 자신들의 역량을 집중하여 스위스 시계산업의 부흥을 주도하였다. 스와치는 시계가 더 이상 시간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알았다. 그들은 여러 브랜드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고객들이 원하는 가치를 창출해 냈고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모든 브랜드가 스와치 그룹의 것이지만 마치 독립된 회사들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와치가 의도한 것이다. 매일매일 분위기에 맞춰 시계를 갈아 차려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Swatch를, 성공한 젊은 기업인들에게는 Omega를,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Blancpain을 차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각각의 브랜드가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와치 그룹은 각 브랜드들의 엄격한 독립성을 인정한다. Swatch와 Blancpain을 디자인하고 파는 사람들은 마치 물과 기름 같다. 사고방식도 생활방식도 다르다. 브랜드가 지닌 독자적 이미지와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어설프게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문화를 선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스와치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새로운 개념을 시계에 입힐 수 있었던 ‘스와치의 핵심’이다.

출처: 한국가스공사,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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