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자본에 대한 새로운 인식

우리는 흔히 ‘기업은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기업이 인간과 같이 살아있는 유기체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비즈니스는 기업의 부(富)를 창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이윤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사람과 같다면 ‘비즈니스의 핵심은 이윤추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우리가 졸부를 존경하지 않듯, 많은 돈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존경의 대상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과 자신의 전문지식으로 경제적인 부를 쌓고, 자신에게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사람이 졸부나 고도의 지식을 소유한 이들과 다른 점은 높은 도덕성과 윤리적 철학을 직업과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정신적 자본으로

우리는 21세기가 ‘지식사회’라는 것을 별 무리없이 받아들인다. 새천년이 지식의 시대임을 인정한다면 개인과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은 ‘지식’과 ‘기술’로 대변되는 정신적 자본이다. 정신적 자본은 지식, 기술 그리고 역량과 같은 ‘무형자본’을 의미한다. 정신적 자본은 피터 드러커를 비롯한 세계적 석학들이 강조하는 ‘21세기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다. 게리 하멜과 프리할라드가 주장한 ‘핵심역량’도 ‘기업의 정신적 자본에 기반한 전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기업은 비전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문지식과 기술을 보유해야 한다.

현대는 기술의 시대요, 지식의 시대요, 전문 기업의 시대다. 위대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업에게도 ‘학습’은 습관화되어야 한다. 학습은 개선과 혁신의 기본조건이다.


나이키는 지식기업

1975년 출범 후 매출액 90억 달러를 상회하며 스포츠 시장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나이키는 제조시설을 갖고 있지 않다. 나이키는 스포츠용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공장 하나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이키는 디자인, 상품개발 그리고 마케팅으로 먹고 사는 회사다. 다시 말해 나이키의 핵심역량은 디자인과 상품개발 그리고 마케팅이다. 그렇다면 디자인, 상품개발 그리고 마케팅은 누가 어떻게 수행하는가?

바로 사람이 자신의 두뇌와 지식을 통해 수행한다. 두뇌와 지식, 바로 정신적 자본이다.


무형자본, 브랜드의 힘

한국존슨은 자산가치가 90억원에 불과한 삼성제약(에프킬러)을 인수하면서 브랜드 값으로 297억원을 지급하였고, 질레트는 로케트전지와 브랜드 사용권(7년)을 계약하면서 660억원을 지불키로 합의하였다. 또한 1988년 필립모리스는 식품회사 크래프트 인수시 장부가격의 6배를 지불하면서 ‘기업이 아닌 브랜드를 구매’했음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잠시 선진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살펴보자.

1999년 기준 인터브랜드사의 조사결과를 보면 코카콜라 840억 달러, 마이크로 소프트 570억 달러, IBM 440억 달러 그리고 GE의 브랜드 가치는 340억 달러에 달한다. 아시아 기업 중에서는 소니(18위, 140억 달러)와 도요타(20위, 120억 달러) 두 기업만이 20위에 겨우 턱걸이했다. 그럼 국내에서 몇 년째 브랜드 자신가치 수위를 고수하고 있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얼마나 될까?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52억 달러(삼성의 전자제품 기준)로 코카콜라의 16분의 1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제까지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갈수록 중요성이 더해 가는 브랜드, 브랜드는 무형자본 즉 정신적 자본이다.


정신적 자본을 넘어서 도덕적 자본으로

앞서 무형자본의 한 축으로써 정신적 자본을 제시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형자본의 다른 큰기둥에 해당하는 도덕적 자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도덕적 자본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은 더 이상 ‘이윤극대화’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희생할 수 없다.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고객과 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병든 사회에서는 어떤 조직-기업, 병원, 대학, 정부 기관 등 어떤 종류의 조직이든-도 번영을 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포춘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 순위’와 역시 포춘지가 발표하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는 점차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 존경받는 전문가가 돈을 잘 벌듯이, 돈 잘 버는 기업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다. 단, 존경이 우선이고 돈은 나중임을 명심해야 한다. 돈을 잘 벌어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돈은 존경을 쫓지만 존경은 돈을 쫓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존슨앤존슨(J&J)은 1982년 누군가가 자신의 제품(타이레놀)에 독극물을 투입한 ‘타이레놀 사건’의 해결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고객의 신뢰를 지켰다. 존슨앤존슨은 사건이 발생한 즉시, 기자회견과 TV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타이레놀을 구입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사건이 시카고 지역에서만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전 미국 시장에서 타이레놀을 회수하였다. 존슨앤존슨은 이런 일을 하는데 모두 1억 달러의 비용과 2,500명의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것은 존슨앤존슨에게 도덕적 자본의 저축으로 이어졌다.


인텔(Intel) vs 안철수연구소

안철수연구소는 인텔과 같은 IT분야에 속해있지만 기업규모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인텔은 2000년 기준으로 340억 달러(약 40조원), 총고용인원 4만 7천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조업체인 반면, 안철수 연구소는 매출액 150억원, 종업원은 170명인 보안전문 벤처기업이다.

이렇게 다른 두 기업이 매우 유사한 ‘위기상황’을 겪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여기서 위기상황이란 인텔의 ‘펜티엄칩 오류’(초기 75 모델의 부동 소수점 에러)와 안철수연구소의 1999년 ‘바이러스에 감염된 백신제품 사건’을 의미한다. 두 기업에게 각각의 사건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고 두 기업 모두 고객의 신뢰를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손꼽히는 인텔(2000년 기준, 4위)의 대처방식보다 한국을 대표하는 안철수연구소의 대응이 더욱 즉각적이고 효과적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두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텔의 경우는 ‘펜티엄칩의 사소한(?) 오류’를 정말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저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소한 오류가 고객에게는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CEO이었던 앤디 그로브는 고객과 언론의 쏟아지는 비난을 받고 뒤늦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당시만해도 ‘편집광’이 아니었다.(그는 이 사건의 몇년 후에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저서를 발간하였다) 그로브는 재빨리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전량 무상 리콜과 교환’이라는 파격적인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다행히 인텔의 발빠른 조치는 인텔이라는 브랜드 가치의 손실을 최소화시켰고 인텔에 대한 고객의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인텔의 다소 늦은 초기대응에 비해, 안철수 연구소의 대처는 매우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1999년 12월 28일, 백신프로그램인 V3가 러브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인터넷을 통해 2,000여명에게 전송됐다. 당시 좋은 이미지로만 커나가던 회사가 한 실수인지라 ‘좋은 뉴스거리’가 되었고, 이 사태는 안철수연구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CEO 안철수는 앤디 그로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경과를 사실대로 설명한 글을 고객에게 메일로 발송하고 홈페이지에 별도의 창을 만들어 게재했다. 또한 치료 프로그램을 배포해 피해 방지에 나섰다. 이 모든 일이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사태는 빠르게 수습되었고 고객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안철수연구소는 인텔에 비해 초기 대응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께서 말씀하신 이 정신적, 도덕적 자본은 저축하면 할수록 힘이 강해지고 그렇지 않을수록 힘이 약해진다. 이렇듯 훌륭한 기업은 앞에서 말했듯이 훌륭한 사람과 매우 닮은 쌍둥이다. 기업 자산이 풍부하고 지식(기술)의 수준이 매우 높은 기업이라고 훌륭한 기업이 아니다. 그저 좋은 기업일 뿐이다. 훌륭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 자본, 도덕적 자본을 축적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출처: 한국가스공사,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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