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순신(李舜臣)

이순신은 전투에 임할 때 한 치 흐트러짐도 없었다.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옥포해전(玉浦海戰)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한 상태였다. 공포심은 극에 달했고 전쟁경험은 부족했다. 적선을 바로 지척에 두고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태산과 같이 하라.”

적은 눈치 채지 못했고 기습공격은 성공했다.

1597년 9월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적선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명량해전(鳴梁海戰)이다. 거북선은 한 척도 없었다. 전투가 있기 전날 그는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다음날 전투가 시작되자, 이순신은 선봉에 섰고 적진을 향해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적선의 수에 놀란 다른 장수들은 뒷걸음치며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장군은 주저하는 거제 현령 안위(安衛)와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金應)을 꾸짖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정녕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불세출의 명장,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이순신. 군사들 앞에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었던 이순신은 늘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하지만 그런 그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존경하게 된 것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게 된 후부터다.

집 앞, 작은 마당에 나가 담배를 태웠다. 낡은 집인 줄만 알았는데, 달 보기가 좋은 곳이다. 적당히 어둡고 조금 높이 있는 집이어서 그런가 보다. 달 보며 담배를 태우는데 술만큼 괜찮았다. 방으로 들어와, 길벗이 생일선물로 사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노트북이라 소리가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이어폰이 좋아서인지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고마운 마음이다. 음악을 들으며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었다.

난중일기를 아껴 읽었다. 읽으며 생각하는 것이 많고 배우는 것이 깊었다. 대개 이순신에 대해 알고 싶어 난중일기를 읽는다. 그러나 끝까지 읽기 어렵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알기도 전에 지쳐 책을 덮게 된다.

오히려 난중일기는 어느 정도 이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읽는 것이 좋다. 신격화된 그의 모습 뒤의 진짜 이순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기는 개인적인 기록이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쓴 글이므로 솔직할 수밖에 없다. 난중일기를 읽으면 인간 이순신이 보인다.

난중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와 문장을 몇 개 꼽아보면 이렇다. ‘어머니’, ‘근심걱정’, ‘울었다’, ‘아프다’, ‘화살을 쐈다’, ‘날씨’. 이틀에 한번 꼴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글로 표현했고, 삼일의 한번 정도는 나라와 전쟁에 대한 걱정을 털어 놓았다.

백의종군(白衣從軍) 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울음으로 일기를 끝낸 날이 부지기수다. 백의종군 후의 일기에서 자주 보이는 문장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미안하다’는 문장이다. 내 기억으로는 백의종군 전의 일기에서는 이 문장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백의종군하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 고마움을 미안함으로 표현한 것이 많아진다. 백의종군 후의 일기를 보면 이순신의 자살설이 나온 이유도 알 것도 같다. 그는 ‘일찍 죽고 싶다’, ‘때를 못 만나 태어난 것이 한스럽다’ 등의 마음을 여러 차례 적고 있다.

이순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주 아파 땀을 많이 흘리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몸이 좋지 않은 날이면 그는 늘 땀을 흘리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시기에는 일주일 넘게 아펐다.

일기를 쓰지 못한 날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기에 날씨를 기록해뒀다.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늦게 날이 갰다’,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맑았다’처럼 날씨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심지어는 날짜와 날씨만 적어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이순신이 날씨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일기의 형식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아마 수군과 해전이라는 상황적 요인 때문이리라.

난중일기를 읽어야만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순신이 점(占)을 자주 치고 그것에 위로를 받거나 긴장을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1594년 7월 13일 일기를 보자.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유성룡을 의미함)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

한 번 점을 쳐보니, 잘 나왔다. 그런데 못 미더웠던지 한 번 더 쳐 본다. 두 번째도 좋게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음은 1594년 9월 28일의 일기이다.

“28일 흐리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적을 토벌하는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는 것과 같다고 나왔고, 다시 점쳤더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나왔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한 번은 잘 나오고 두 번째는 별로였다. 이순신은 별 다른 말없이 일기를 마치고 있다. 그는 점뿐만 아니라 자신이 꾼 꿈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도 여러 번 일기에 나오지만, 두 개만 보자. 먼저 1594년 9월 20일 일기 중 한 단락이다.

“20일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고 비도 잠시 왔다 개었다. 혼자 앉아서 간밤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

밤 새 누웠다 앉았다하며 잠을 청하지 못했다. 몸이 아프고 머리에는 근심이 가득한 탓이다. 왕은 싸우지 않는다고 독촉하고 적은 숨어 나오지 않는다. 답답해하며 한숨짓기를 여러 번,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을 꿨는데 깨고 나서도 생생하다. 조용히 생각하고 해석해보니 좋은 듯하다. 기분이 나아지고 자신감도 생긴다.

다음은 1594년 11월 25일의 일기다.

“25일 흐리다. 새벽 꿈에 이일(李鎰, 당시 순변사)과 만났다. 내가 말을 많이 하였는데 ‘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서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게 육전에서나 쓸 군기(軍器)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하였다. 순변사는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

우연히 꿈속에서 이일을 만나자 이순신이 호통을 쳤다. 과묵한 이순신이 스스로 ‘말을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이일과 사연이 있다. 이순신이 1586년 조산보(造山堡) 병마만호이자 녹둔도 둔전관(鹿屯島 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시절, 이순신은 녹둔도가 외롭고 내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이일에게 더 많은 군사를 파견해줄 것을 여러 차례 건의했다. 그러나 이일은 끝까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오랑캐가 쳐들어왔고 많은 병사들이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두목을 활로 쏘아 죽이고 섬을 지켜냈다. 당시의 병력과 상황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전과였다. 그러나 이일은 조정에 자신의 과실을 숨기기 위해 이순신의 잘못으로 패전했다고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도 이일의 말만 믿고 이순신에게 죄를 물어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이순신이 이일을 좋게 생각했을리 없다.

이순신은 1597년 4월 감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元均)은 칠전량에서 대패했고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8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전국을 돌며 수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는 초라했다. 그에게는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 가량이 전부였다. 임금조차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는 바다를 버릴 수 없었다. 바다를 잃으면 어떻게 될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狀啓)에 이런 내용이 있다. 유명한 구절이다.

“……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내친 임금에게도 늘 한결 같았다. 담담했다. 조용한 자신감을 보였다. 조용하고 곧은 그였지만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정쟁에 빠진 정치가들을 경멸했고 뒤에서 자신을 욕하는 원균을 비웃기도 했다. 정치가를 경멸했기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을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두려워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가소롭다(可笑)’는 표현이 가끔 나온다. 이런 표현은 그가 몹시 기분이 나쁠 때 쓰는 욕이다. 특히, 원균에게 쓴 적이 많이 보인다. 세 개만 옮기면 이렇다. 처음 것은 1593년도 8월의 일기이고, 두 번째 것은 1595년 2월에 적은 것이다. 마지막 것은 1596년 1월 28일 것이다.

“(…) 또 원수사(원균을 말한다)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원균이 포구에서 교대하려고 도착하였기에 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라고 하였는데 불평하는 기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번 타이른 뒤에야 억지로 행하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28일 맑다. 늦게 관청으로 나갔다. 정오에 순찰사가 와서 활쏘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열에 일곱을 지고는 섭섭한 기색을 삭이지 못하니 가소로웠다. 군관 세 사람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서 돌아갔다. 가소로웠다.”

백의종군 중에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그는 불길함을 느꼈다. 1597년 4월 11일 일기다.

“11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德)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

꿈이 몹시 불길했다. 그는 불안했다. 얼마나 안 좋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까. 이순신의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을 감안하면 아주 드문 경우다. 불운하게도 그의 느낌은 맞았다. 이틀이 지난 13일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順和)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임금으로부터 버림받고 어머니까지 잃은 그는 절망했다. 충과 효는 그가 평생 동안 간직해 온 핵심가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내가 평생을 충 ․ 효에 전심했건만 이제 와서 모두 헛된 일이 되었구나!”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1597년 5월 5일 일기 중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1597년 5월 6일 일기 중에서)

어머니의 죽음에서도 그랬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보통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셋째 아들 면이 전사했을 때 그는 절망했다. 일기에 이렇게 적혀있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정신 놓고 통곡했다고 하는데, 다음 날도 그는 일기를 썼고 그 다음 날도 빠지지 않고 썼다. 울면서도 썼다. 면이 죽은지 몇 일 후 저녁에 그는 코피를 흘렸다. 코피는 한 되 넘게 나왔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그는 울고 울었다.

나는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여러 모습의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불패의 명장이었다. 군율에 엄격하면서도 부하들을 세심히 배려하는 장수였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사랑한 충신이었다. 조용하고 담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욕하는 사람을 비웃고 미워하기도 했다. 조용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근심 또한 많았다. 전장에서 적을 향해 칼을 매섭게 겨누는 무장인 동시에 밤에는 자주 몸이 아픈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다. 그는 우리처럼 온전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일기의 전후 행간을 읽으면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보인다.


※ 위에 나온 일기의 내용은 송찬섭이 편역한 ‘난중일기(이순신 저 / 송찬섭 편역 / 서해문집 / 2004년 8월)’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도 좋지만 난중일기를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 역 / 동아일보사 / 2005년 11월)’도 좋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껏 나온 것 중 가장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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