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민 뱅크-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3]

담보 없는 소액 융자(microcredit) 방식

그라민 은행은 ‘담보 없는 소액 융자’를 제공한다. 설립 초창기에 많은 금융 전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담보 없이 대출을 해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라민 은행이 행하는 소액 융자가 한 가정의 경제적 여건을 호전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담보 없이 이루어지는 소액 융자가 담보를 안고 하는 융자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한 소액 융자의 원금 상환율은 98%를 넘었고 소액 융자를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라민 은행의 목표는 ‘부자 만들기’가 아니라 ‘가난 극복’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활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 한 번에 많은 돈을 빌려주면 오히려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정말 절실한 것은 열심히 하면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액 융자는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미 1970년 대 후반 진행된 실험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소액 융자의 효과는 확인됐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조 공장이나 큰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드는 돈이 아니라, 대나무 의자나 빵, 혹은 옷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비였다. 일반 은행의 거액 융자가 여러 문제점을 동반하는데 반해, 소액 융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창의성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방글라데시의 기업가나 부자들은 정치인들과 검은손을 잡거나 법을 교묘히 빠져나감으로써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그래서 산업개발은행의 원금 회수율이 10%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에게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다.

담보가 필요 없다는 점만 보면 그라민 은행에서 돈 빌리는 것이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은행의 융자 조건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 독특하고 까다롭다. 독특한 까닭은 이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고, 까다로운 이유는 그라민 은행이 하는 일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활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면 융자를 해주지 않는다. 경제적 수입 기준으로 하위 25%가 되어야 융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니까 가난할수록 돈 빌리기가 쉬운 곳이 그라민 은행이다. 이 원칙은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그라민 융자 프로그램이 적용되는 모든 국가와 지역에 적용된다. 그라민 은행의 한국지부인 ‘신나는 조합’도 마찬가지다. ‘신나는 조합’의 융자를 받으려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재산이 3천 만 원을 넘으면 안 되고, 한 달 수입이 100만 원을 넘어도 안 된다.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은 가진 땅이 농부 1인당 평균 경작 면적인 3,000평보다 적어야 한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대부분의 은행들은 대기업에는 수천 억 원씩 떼이면서도 서민들에게는 좀처럼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지요. 하지만 신나는 조합에서는 돈 없고 배경 없는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잘 증명할수록 더 기쁘게 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그라민 은행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방글라데시의 일반 은행들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차별해왔다. 당시 융자를 받은 여성의 비율은 1%도 안 됐다. 그라민 은행은 일반 은행들과는 반대로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난한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원칙이다. 현재 300백만 명이 넘는 그라민 은행의 회원 중 95%는 여성이다. 방글라데시의 문화와 종교적 특성을 감안할 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이유는 가난의 문제가 남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의 일상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기근이나 가난에 더욱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식구들이 배를 곯아야 한다면, 대개는 어머니가 가장 먼저 밥을 굶는다. 대체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기근이나 양식이 부족할 때 자식들을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여성에게 그 고통은 더욱 심하다. 그래서 만일 여성에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성은 남성보다도 더욱 투쟁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라민 은행은 잘 알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은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이 실제로 남성들보다도 가족의 기반을 닦는 데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악착스럽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자녀의 미래에 관심이 많으며, 일에서도 더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유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한 여성에게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그 돈은 가장 먼저 자녀들을 위해서 쓰인다. 그 다음으론, 집안 살림에 쓰이는데, 이를테면 부엌용품을 산다거나, 지붕을 새로 얹는다거나, 가족의 편의를 위해 쓰는 식이다. (……) 경제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삶의 질을 높이고, 가난을 줄이고,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성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용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상당 비율을 차지한다. 게다가 여성은 자녀들과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성이 우리 방글라데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들만의 연대보증 방식

그라민 은행은 ‘연대 보증 융자’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혼자 오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대출해주지 않는다. 다섯 사람이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와야 한다. 융자는 개인 명의로 주되, 책임은 그룹 공동으로 지는 방식이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혼자이면 안 되고, 자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룹을 지어야 하며 그룹 내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유사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5명이 그룹을 지어 뭉치면 보다 안정된 느낌을 갖는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서는 계획도 잘 세우지 못하고, 실천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게 때문에, 융자를 받게 되면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력도 강해진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는 “1명은 외롭고, 둘이면 마음모아 도망가기 쉽고, 3명이면 한 사람이 소외되고, 4명이면 편이 갈려서 5명이 가장 알맞다”고 말한다. 그라민 은행은 융자를 원하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그룹을 만들 것을 적극 권한다. 왜냐면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그룹일수록 결속력과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룹 짓기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실제로 그룹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직접 찾아가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며 함께 융자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가난한 여성 5명으로 그룹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융자를 받기 위한 자격 조건이 모두 갖춰진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그룹 구성원들은 예외 없이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시험을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시험은 구두로 진행된다. 은행 직원들은 그룹 구성원들은 각각 따로 불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한 명이라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하고, 다섯 명 모두가 시험을 통과해야만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직원들은 이 과정을 통해 가난 극복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자립 가능성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그룹을 만들고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떨어져서 다시 시험을 보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인내심과 결심이 약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한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도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극을 받고 강한 책임감과 실행력을 갖게 된다. 이런 점을 보면 그라민 은행의 연대 보증 방식은 일반 은행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라민 은행은 어떤 그룹에 융자를 제공하기로 확정해도,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한다. 우선 그룹의 한 사람에게 먼저 융자를 주고 난 다음에 다른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그런 후 세 사람이 6주 동안 제대로 원금을 갚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융자를 준다.

그라민 은행이 이 처럼 독특하면서도 철저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굳은 결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돈을 빌릴 수 있게 하여, 그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가고 투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 보다 ‘의지’가 상환 능력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은행에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한 명이 그라민 은행에서 제공하는 소액 융자를 통해 가난을 딛고 일어서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공만큼 설득력이 강한 것은 없다.


나도 돈을 갚을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일반 은행들이나 제 2금융권은 개인에게 융자를 주고 원금을 일시에 돌려받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방식에서는 돈을 빌린 사람은 만기가 되면 한 번에 돈을 갚아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대개 융자액을 늘려가면서 만기일을 가능한 미루게 되고, 결국에는 돈 갚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라민 은행은 기존의 은행들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그라민 은행의 ‘융자의 상환 기간은 1년’이다. 1년으로 못 박은 이유는 회계를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상환 기간에 수반되는 여러 절차와 서류 작업 등을 없애기 위해서다. 융자를 받는 사람은 1년 동안 매주 조금씩 원금을 나누어 갚는다. 1주일 단위로 소액을 상환함으로써 원금 상황의 부담감을 줄이는 것이다. 이 방식의 두 번째 장점은 고객 관리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누가 돈을 갚고 누구는 돈을 갚지 않았는지 수시로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돈을 떼먹고 달아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경제적 여건이 나빠져 상환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도 짧다. 또 다른 장점은 융자를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큰 부담 없이 스스로 원금을 갚아나가는 경험과 ‘나도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일 년 간 매주 원금 중 일부를 소액 상환하는 방식’은 융자를 받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라민 은행의 융자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은행보다도 엄격한 상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돈을 빌린 사람은 자연재해나 개인적인 사고를 당한 경우라도 조금이나마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사람에게는 주당 상환금을 아주 낮춰서라도(예를 들면 0.1퍼센트) 상환은 반드시 하도록 한다. 이것은 아무도 어길 수 없는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돈을 빌린 사람의 독립심과 책임감을 높이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어떤 마을에 홍수나 기근이 들었을 때, 그라민 은행은 이미 융자를 받았던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또다시 융자를 준다. 하지만 이 때에도 전의 융자를 일부 탕감해주거나 없던 것으로 하는 경우가 없다. 장기 융자로 전환하여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두 갚도록 한다.

자연재해나 사고처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융자를 받은 사람은 적어도 50주 동안 매주 원금의 2퍼센트 이상을 상환해야 한다. 소액 상환의 특성상 몇 번 상환을 거르게 되면 서로 간에 신뢰가 깨지게 되고 나아가 습관적으로 상환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경계하는 것이다. 유누스는 이렇게 강조한다.

“심리적 관점으로 볼 때, 회원과의 관계에서 신뢰만큼 중요한 요인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석 달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주일 단위로 꾸준히 상환을 했다고 한다면, 그는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상환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왜냐면 이미 원금의 4분 1을 갚았고, 앞으로 4분의 3만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원금의 절반을 갚았을 경우, 이젠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은행에서는) 일 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도록 되어 있다. 이들은 매번 갚아야 하는 금액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때론 의식도 못하고 돈을 갚는다. 오히려 흔쾌한 마음으로 돈을 갚는 것이다.”

엮인 글:
그라민 뱅크-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1]
그라민 뱅크-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2]
그라민 뱅크-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3]
그라민 뱅크-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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