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의 미학

앞으로 늦은 밤에는 수필을 읽어야겠다. 부드럽고 담백한 수필을 읽어야겠다. 그래서 좀 더 착해지고 너그러워지고 따뜻해져야겠다. 무엇보다 작게 반성하여 조금 더 나아져야겠다. 수필 몇 꼭지와 함께 클래식을 함께 들어야겠다. 음악은 적당히 조용하고 선율은 단순하면 좋겠다. 수필 몇 꼭지와 클래식 몇 곡, 그리고 여기에 가끔은 와인도 함께해야겠다. 수필, 클래식, 와인의 조합은 자연스럽다.

『근년 미국 가는 길에 동경에 들러 한 친구를 만났더니, 그는 나를 보고 미국에 가거든 옷 좀 낫게 입고 다니라고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그래 보스턴에 도착하자 나는 좋은 양복을 사 입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백화점을 돌아다녀 보아도 좋은 감으로 만든 기성복으로는 내게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맞춰 입을까 했더니 공전이 놀랄 만큼 비쌌다. (…) 나는 하는 수 없이 싸구려를 한 벌 사 입었다. 저고리 소매가 길어 서 좀 거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

가슴을 펴고 배를 내밀고 걸어 보라고 일러 주는 친구가 있다. 옷차림도 변변치 않은데다가 작은 키를 구부리고 다니는 것이 보기에 딱한 모양이다. 그래 나는 어떤 교장 선생님같이 작은 몸을 자빠질 듯이 뒤로 젖히고 팔을 저으며 걸어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몹시 힘든 일이었다. 잘난 것도 없는 나이니 그저 구부리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빨리 위엄이 없다고 일러 주는 친구가 있다. 그래 나는 명성이 높은 어떤 분이 회석(會席)에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끔벅끔벅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 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이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답답하여 나는 그 노릇은 다시 안 하기로 하였다.

어린아이같이 웃기를 잘하여 점잖지 않다는 것은 또 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래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성난 얼굴을 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서영이가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나는 얼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 생기지도 못한 얼굴이 사나워 보인다. 나는 씽긋 웃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날 하루 종일 서영이하고 구슬치기를 하였다. (…) 』

피천득 선생의 ‘낙서’라는 글 중 일부다.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 노력해봤는데, 잘 되지 않았나보다. 스스로가 어색한데, 남이 보면 더 이상할 것이다. 서영이는 선생의 딸이다. 자신과 늘 붙어 다니는 사람이 딸이니, 딸은 바로 알아 차렸을 것이다. ‘아빠가 이상하다. 그것도 나쁘게 이상하다. 걱정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선생은 딸에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음을 알려주기 위해 함께 하루 종일 구슬치기를 했단다. 귀여운 장면이다.

다른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누구나 있다. 부러운 사람처럼 되어 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어울리면 좋은 일이다. 왜냐면 내 안의 숨어 있던 또 다른 얼굴을 찾아낸 것이니까. 어울리지 않으면 그만 두면 될 일이다. 문제는 계속 따라하고 모방하여 더 이상해지는 경우다. 시간과 에너지, 돈만 축낼 뿐이다. 가장 나쁘다. 가끔은 파격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욕심을 부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으려면 그 파격은 내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파격적이 될 수 있다.

나를 알면 약점과 강점을 알게 된다. 약점은 관리하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나를 알면 치졸함과 매력도 알게 된다. 치졸함을 줄이고 매력을 깊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나를 알면 화낼 일과 기쁠 일도 알게 된다. 화낼 일은 피하고 기쁠 일은 꽉 안을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렵다. 나는 8년째 헤매고 있다. 요즘만 해도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 그리곤 스스로 낯설어하며 한 숨 지었다. 이제 그만 두련다. 고생하며 그런 짓 하느니, 내 안을 좀 더 들여다보는 것이 낫겠다. 앞으로 한 10년 지나면 알게 되어 깊어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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