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담은 독서,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책은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책은 향기를 낸다. 그것은 책이나 사람이나 비슷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슷하다. 금방 친해지는 책이 있고 천천히 깊어지는 포도주 같은 책도 있다. 존경하는 스승처럼 위엄 있는 책도 있다.

운명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그녀’처럼 온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음에도 단박에 알아보듯이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내 경험을 돌아보면, 일 년에  100권의 책을 대충 읽는 것보다 ‘그녀’같은 책 10권을 깊게 보는 것이 더 낫다. 역설적인 것은 많이 읽어야 ‘그녀’ 같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읽어야 한다.

가장 좋은 독서는 즐기는 것이다. 독서를 즐긴다는 것은 어떤 책을 자기 마음대로 읽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읽는 사람과 그 책이 통해야 한다. 어떻게 읽어도 즐길 수 읽을 정도가 되면 독서술은 이미 사라진다. 그러나 초기의 독서는 끄집어내고 발견해내서 그것을 가져가는 과정이다. 이런 독서는 힘껏 읽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이고 참는 것이다. 깨달음은 땀과 함께 온다. 독서에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책을 잘 읽는 방법 중 하나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읽는 것이다. 매일 하는 것처럼 좋은 수련은 없다. 그런 하루가 쌓이면 독서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떤 책을 극복하면 즐길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면 그 책의 진수를 터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즐겁지 않다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는다면 즐겁지도 않게’ 되면 학인(學人)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극복하지 않고는 즐기기 어렵다. 그러니 힘껏 읽어야 한다.

많이 읽다보면 생각의 넓이와 깊이 둘 다 확장되는 순간이 온다. 반대로 많은 생각으로 읽다보면 독서량이 늘어나는 시기가 온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지속적으로 읽는 사람은 두 경우 중 하나를 겪는다. 많이 읽는 사람은 생각에 더 힘써야 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독서량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12세기 프랑스의 시토교단 수도자이자 신비주의자인 베르나르 폰 클레르보는 “사색 없는 독서는 위태롭고 독서 없는 사색은 방황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생각과 독서는 손잡고 함께 춤춰야 한다. ‘앞으로 뒤로 한 바퀴 돌고 옆으로, 파트너 바꿔서 다시 앞으로 뒤로…’ 독서의 즐거움은 춤추는 즐거움과 비슷하다.

한 때 빠르게 무지막지하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저 읽은 책의 목록을 늘리는데 급급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참 바보 같은 짓임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책은 알맞은 속도로 읽어야 한다. 속독의 힘을 알지만, 그것은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내공이 쌓인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속독과 속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속독(速讀)이 속해(速解)는 아니다. 속독의 장점은 속도와 집중력의 증진에 있다. 이해가 목적인 독서라면 속도보다는 정신적 흐름이 더 중요하다. 독서의 목적, 책의 성격과 난이도에 따라 읽는 속도를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책을 읽는 가장 좋은 속도는 ‘쓸데없이 천천히 읽지 않고 이해도 못할 만큼 빨리 읽지 않는 것’일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깊이 읽는 것이 넓은 독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정독(精讀)이 다독(多讀)을 부르는 것이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이 그저 느리게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깊이 읽는다는 것이고 또한 넓게 읽는 것이다. 깊이와 넓이는 상극의 관계가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독서와 기록은 마땅히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57세에 썼고, ‘’판단력 비판‘은 66세, 종교론은 69세에 완성했다. 찰스 다윈은 50세에 ‘종의 기원’을 썼고, ‘인간의 유래’는 62세에 쓴 것이다. 학습과 자료가 축적되면 개인 차원의 지식관리로 발전할 수 있다. 자료의 축적과 지식 관리의 바탕은 기록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지 않은 것은 십중팔구 잊혀진다. 좋은 방법은 ‘나만의 독서노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독서노트는 다양한 틀로 구성할 수 있다. 책의 핵심내용과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포함하는 것이 좋다. 쉽지 않겠지만 저자의 관점에 서보는 것도 사고의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 정리하면 독서노트는 ‘인용(3page) + 소감(2page) + 저자 되기(1page)’ 식으로 정리하면 실용적이고 탄탄하다.

맹자는 독서를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했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저 책읽기가 ‘지식 습득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좋은 책은 잃어버렸던 마음을 들추어내고 소환한다. 여행이 그렇듯이 바쁘게 지나가는 여행은 재미도 없고 유용하지도 않다. 여행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바로 그 현장에 있는 것’이다. 책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책이고 만족스러운 독서이다. ‘독서의 기술’에서 모티머 아들러(Motimer J. Ardler)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랑에 빠져서 연애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읽는다. 그들은 단어 한마디 한마디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행간을 읽고, 여백을 읽는다. 부분의 견지에서 전체를 읽고, 전체의 견지에서 부분을 읽는다. 콘텍스트와 애매성에 민감해지고, 암시와 함축에 예민해 진다. 말의 색깔과 문장의 냄새와 절의 무게를 알아차린다. 심지어는 구두점까지도 고려한다.”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마음을 담은 독서는 이런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나 스승과 같다. 그렇게 좋고 그렇게 만나기 힘들다. 중국의 양명학자인 이탁오가 말한 것처럼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좋은 책은 친구 같은 스승이고 스승 같은 친구이다. 그래서 한번 만나면 헤어지기 어려워 몇 년을 읽고 어떤 책은 평생 함께 간다. 이런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과 통찰을 전해준다. 그래서 곁에 두고 자주 보는 것이 좋다. 나를 감동시키고 도와준 책을 모아 ‘나만의 고전 목록’을 만들어보자. 그 책들의 저자들을 모아 ‘나만의 교수진’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이 유용한 책과 좋은 스승을 언제든 활용할 수 있도록 곁에 두는 방법이다.

정조 시대의 문인 유한전이 김광국이라는 사람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는 이 말이 진실임을 안다. 애석한 점은 사랑할 만한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읽게 된다. 책을 고르는 지혜는 잘 읽는 것과 함께 간다. 마음을 담아 읽다보면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다. 책에 ‘정성’을 쏟으면 그 책은 자신이 담고 있는 비밀과 핵심을 조용히 때로는 격렬히 말해준다.

이제까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신영복 선생은 ‘강의’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공의 힘은 놀랍다.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있는 경지입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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