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백전백승? [1]

우리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란 말을 종종 사용한다. 특히, 경영자나 학자들의 글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구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좋은 말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모두 이긴다’는 뜻이 아닌가. 기업의 측면에서는 정확한 기업의 내부환경 분석(핵심역량이라고도 한다)과 경쟁자 분석을 통해 적절한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하면 시장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지피지기 백전백승’이 과연 맞는 말일까? 우스운 질문 같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첫째,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은 없다.
둘째, ‘지피지기 백전백승’은 전략적으로도 틀린 말이다.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이 없다

손자병법을 지은 손자는 본명은 손무(孫武)로써, 러안[樂安:山東省]에서 출생한 제(齊)나라 사람이다. BC 6세기경 오자서의 권유로 오(吳)나라의 제후(諸侯) 합려(闔閭)를 섬겨, 초(楚) 제(齊) 진(晋) 등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려가 춘추전국시대의 패자(覇者)로 만든 병법가(兵法家)이다.

중국에서는 ‘손무 이전의 전쟁’과 ‘손무 이후의 전쟁’을 구분할 정도로 손무는 ‘병법(兵法)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로 통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이 논어(論語), 노자(老子), 주역(周易)과 함께 중국의 4대 경전으로 불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손자병법에는 전략과 전술 이상의 것, 바로 철학과 가치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손무는 요즘으로 말하면 실용적 지식인이자 벤처 군사 전문가였다. 새로운 시대환경(손자가 활동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였다)에 맞는 전쟁철학을 가지고 오(吳)나라 군주에게 가서 자신을 스카웃 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신의 병법 철학을 제시하면서 오나라 왕 합려(闔閭)에게 내놓은 것이 ‘군사 전략 보고서’인 손자병법이다. 약 6천여 한자 분량인 손자병법은 모두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손자는 세 가지 전쟁철학을 갖고 있었다.

첫째, 손무는 신전론자였다. 손무는 전쟁을 옹호-호전론(好戰論)-하거나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반전론(反戰論)-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 신중한 신전론(愼戰論)자였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손자병법의 첫 구절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孫子曰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손자가 말하길.
전쟁은 나라의 어떤 일보다 큰 일이다.
전쟁터는 병사들의 생사가 달려있는 곳이며,
전쟁의 승패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길이다.
(따라서) 전쟁은 신중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원칙보다 변칙이 더 중요하다.
손자는 원칙에 충실한 전쟁과 전략보다는 상황에 따른 다양한 변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적의 허점과 나의 강점을 파악하여 나의 강점으로 적의 허점을 공격해야 한다는 ‘이실격허(以實擊虛)’의 허실(虛實) 전략은 그의 전쟁철학의 백미다.

셋째, 전승(全勝)철학.
손자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 전승철학이다. 여기서 전승은 ‘아군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승리’ 그리고 ‘빠른 승리’를 의미한다. 손자는 피 흘리고 이기는 전쟁은 아군이나 적군 모두 그 대가가 너무나 혹독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손자는 적의 군대를 작전목표로 세워 적을 공격하는 벌병(伐兵)과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공성(攻城)을 병법의 가장 하책(下策)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벌병과 공성 모두 아군의 피해가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손무의 전승철학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만약 직접적인 전쟁을 하더라도 빠른 시간 안에 끝내서(여기서 速戰速決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엮인 글:
지피지기 백전백승? [1]
지피지기 백전백승? [2]
지피지기 백전백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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