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라인 확장의 함정

한동안 뜸했던 맥주 광고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가장 시선을 잡아 끈 것은 하이트의 ‘HITE PRIME’이었다. 100% 순수보리로만 만들었다는 광고카피가 입맛을 자극한 탓인지 하이트에 비해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시장 진입에 성공한 듯 보인다. 사실 외국 맥주 중에 상당수는 순수한 보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맛이나 품질에 있어 하이트 프라임이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국내 브랜드 중 최초라는 점과 일반 소비자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맥주 품질에 관한 상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맥주를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하이트가 업계 선두에 오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만연 2위의 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계기는 1993년 현재의 회사명이 되어버린 HITE 맥주의 출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맥주(현재 하이트)의 대표 브랜드였던 크라운 맥주는 OB맥주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찾는 맥주에 불과했다. 아직도 크라운 맥주의 그 씁쓸한 뒷맛이 기억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놀랄만한 마케팅 전략으로 무장한 하이트는 불과 3년여 만에 맥주 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세상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소비자의 마인드를 공격하라

당시 하이트가 광고를 통해 보여준 마케팅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제품 브랜드에서 회사를 철저히 감추는 것이었다. 당시 신선함을 주었던 하이트 광고에서는 맥주를 만든 회사의 이름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지?’, 또는 ‘외국 맥주 아니야?’가 상당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제품을 만든 회사를 알 수 없으니 하이트 맥주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맥주 그 자체의 맛과 광고가 전하는 이미지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주어져 있지 않았고, 이는 마치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얀 백지를 사람들의 머리 속에 펼쳐 놓은 것과 같았다.

두 번째는 ‘100% 천연 암반수로 만든 깨끗한 맥주’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맥주는 OB맥주, 크라운맥주, 외국맥주 정도로 나뉠 뿐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맛있는 맥주, 맛없는 맥주, 귀한 맥주 정도랄까? 적어도 소비자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마인드는 확고했고, 각 브랜드는 소비자의 마인드를 제한적으로 차지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바로 이 소비자 마인드의 지도를 바꾼 것이 하이트였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하얗게 자리를 비워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깨끗한 맥주는 하이트’라는 마인드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맥주는 깨끗한 하이트와 그렇지 못한 맥주로 나뉘게 되었다.

이렇게 1990년대 중반 하이트의 포지셔닝(positioning) 전략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며 맥주 산업의 판도를 정반대로 돌려 놓았다. 뒤늦게 경쟁사인 OB맥주가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미 소비자들의 머리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하이트의 이미지를 바꿔 놓지는 못했다. 진부했던 맥주 시장에 깨끗한 물 논쟁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선두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하이트의 시장점유율은 약 54%로 알려져 있다. 브랜드 선호도에서도 ‘하이트’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고, 소비자들은 여전히 하이트를 깨끗한 맥주로 인식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여세를 몰아 ‘하이트 프라임’을 선보이며 OB맥주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과연 하이트 프라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라인 확장의 장점

하이트 프라임은 브랜드 라인 확장의 산물이다. 브랜드 라인 확장이란 기존의 성공적인 제품 브랜드를 차용해 새로운 제품 브랜드를 선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령 성공한 영화의 속편을 내놓거나, 콜라의 대명사인 코카콜라를 기반으로 코카콜라 라이트를 선보이는 것이 그 예가 된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라인 확장도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 양면성을 상황에 따라 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 제품과 브랜드의 성공을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라인 확장의 대표적 장점은 비용절감에 있다. 굳이 큰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확장된 브랜드를 인식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아, 하이트 프라임이라고? 하이트에서 만든 맥주군.’이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만약 하이트 프라임이 아닌 새로운 브랜드를 들고 나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새로운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장기적으로 많은 비용과 노력이 쏟아 부어야 할 뿐 아니라 비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위험부담도 그만큼 커지게 될 것이다.


라인 확장의 단점

하지만 라인 확장의 단점은 치명적인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장점을 희석시키고도 남을 만한 위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단점과 달리 장기적이고 점진적이다. 우선 확장 브랜드는 소비자들의 마인드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이트 프라임이 100% 순수보리로 만든 맥주라는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심으려고 노력하지만 하이트는 하이트일 뿐이다. 보통은 하이트에서 품질이 조금 더 개선된 제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보다는 기존 제품과 시장의 일부 공유하게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하이트와 새 브랜드의 이미지가 혼동을 일으키며 기존 브랜드가 점하고 있던 확고한 위치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커진다. 장기적으로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하이트는 깨끗한 맥주’라고 굳게 믿고 있던 소비자들의 인식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 결과적으로 두 브랜드 모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맥주로 재인식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라인 확장의 위험, 그 몇 가지 사례들

우리 주변에서 라인 확장을 통해 기존 브랜드가 가지고 있던 명성과 가치를 스스로 깎아버린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바이엘은 새롭게 등장한 타이레놀에 대항하기 위해 라인 확장을 통한 다섯 개의 새 브랜드를 내놓았지만 결국 진통제 시장을 내주고 말았다. 새 제품들은 시장의 대세인 非아스피린계 진통제였지만 소비자들에게 바이엘은 아스피린을 의미하는 브랜드였기 때문에 아스피린과 동일한 제품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스피린의 명성에도 흠집이 가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코카콜라와 펩시는 어떤가? 각각 코카콜라 다이어트와 펩시 다이어트를 내놓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열등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인 회사로 눈총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코카콜라가 TAB이라 불리는 다이어트 콜라를 내놓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코카콜라 라이트에 집착하는 이중성을 보이며 TAB의 성공을 스스로 차 버리고 말았다.

위스키로 잘 알려진 조니 워커는 브랜드 확장을 통해 레드, 블루, 블랙 레이블을 만들었다. 가격 차별화를 통해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결국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 영광의 자리들은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진 기업들에게 내 주어야 했다. 조니 워커가 미국에서 처음 자리를 잡았던 12년산 스카치 시장을 시바스 리갈에 내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서

하이트 프라임의 미래는 어떨까? 단기적으로는 하이트라는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브랜드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상황이 안 좋아 진다면 기존의 하이트 브랜드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흐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이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포지셔닝(positioning)의 개념을 세상에 처음 선보인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는 이러한 상황을 ‘실수’가 아닌 ‘함정’이라고 말한다. 라인 확장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엄격하고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효과가 있다. 3M이 대표적이다. 3M의 제품들은 한결같이 라인 확장의 결과이지만 상당한 제품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라인 확장은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단기적인 성과를 누릴 수 있고, 전략적으로 그러한 성과를 취하기 위해 라인 확장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기존 브랜드와 새 브랜드 모두를 보호하고 싶다면 라인 확장 전략은 결코 좋은 선택이 못 된다.

유혹을 뿌리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면 그 유혹은 배가 된다. 더불어 기존 브랜드가 가지고 있던 강력한 힘을 절반이라도 옮겨 올 수 있다면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라인 확장이 위험부담을 줄여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 잘못된다면 그 위험은 배가 될 수 있다.

하이트 프라임이 성공적인 프리미엄 맥주, 더 나아가 ‘100% 순수보리로 만든 맥주’라는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단호하게 뿌리내리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하이트는 옛 신화를 재현하고 싶겠지만 그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만약 경쟁사가 독자적인 브랜드와 정체성을 가진 100% 순수보리 맥주를 옛 하이트와 같은 방식으로 선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부담할 의사만 있다면 재미있는 전쟁이 될 것 같다. 이제 우리 모두 프리미엄 맥주를 즐길 여유가 조금은 생기지 않았는가?

200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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