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엔진, 3M

얼마 전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는 책 한 권을 들고 와서는 불평을 쏟아 내는 것이었다.

“포스트-잇이 안 떨어지는군. 강력 접착제처럼 딱 달라 붙었어.”
“그래? 난 오래 붙여 놓아도 잘 떨어지던데. 이상하군.”

책을 자세히 살펴 보니 친구의 불평이 이해가 됐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자리가 심하게 구겨지고 몇 장은 찢어져 있기까지 했다.

친구의 말처럼 쉽게 떼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한참을 살펴 보고 있는 사이에 친구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우리 나라 제품인데, 이렇게 단순하고 쉬운 것 하나를 못 따라 만들다니. 이래서야 어디 쓰겠어?”

친구의 말처럼 포스트-잇은 정말 단순한 제품처럼 보인다. 작은 종이 노트에 잘 붙었다 떼어지는 접착제를 바른 게 전부 아닌가?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보아서는 그렇게 간단한 기술만은 아닌 듯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따라하기 쉽지 않은, 바로 이 포스트-잇의 비밀에 우리가 주목할 기업 3M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Post-it 이야기

포스트-잇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발명된 이야기도 너무나 잘 알려 있다. 그만큼 포스트-잇이 3M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다섯 개의 사무용품 중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사무용품으로 오늘날 3M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된 포스트-잇의 탄생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M에서 일하고 있던 연구원 아트 플라이는 교회 합창 연습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불러야 할 곡마다 종이로 표시를 해 두었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내 바닥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 아트 플라이는 동료가 만들었던 임시 접착제를 떠올리게 됐다. 낮은 접착성 때문에 외면받던 그 접착제를 이용하면 뭔가 근사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곧이어 접착제를 발명했던 동료와 함께 특별한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 붙지만 떼기 쉬운 접착노트를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회사에서 시킨 일도 아니었고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성공에 따른 보상은 희박했고 실패에 따른 위험은 크기만 했다.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상품의 가치와 필요성을 회사와 직장 동료들에게 설득하는 일이었다. 보통의 메모지보다 더 비싼 메모지를 과연 누가 살 것인지 반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잘 붙지만 떼기도 쉽다는 것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가?

하지만 플라이와 그의 동료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견본품을 만들어 고위 경영층과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전혀 새로운 제품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차츰 사용자가 늘어났고 반응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 플라이는 접착식 노트의 상용화를 위해 사무용품 사업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품은 출시됐고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1980년 세계 최초의 접착식 노트 포스트-잇이 탄생했고, 1년 후 플라이는 3M의 우수 신제품상(Outstanding New Product Award)을 수상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잇의 대중적인 성공과 함께 발명자인 플라이는 3M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 위험과 고난을 감수했을까? 단지상 을 위해서? 아니, 3M에는 플라이와 같은 사람들을 있게 한‘특별한 무엇’이 있다. 어쩌면 아트 플라이와 같은 사례는 매우 특별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3M의 제품들은 모두‘특별한 무엇’에 의해 개발되었고 그 뒤에는 아트 플라이 이상의 열정과 능력을 지닌 직원들이 있었다.


무엇을 만드는가?

3M은 무엇을 만드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포스트-잇 이외에 스카치 테이프, 저장매체, 수세미, 귀마개,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제품들이 있다. 매우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3M의 제품들은 세계적인 기업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제품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3M은 정말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여기 HP의 창업자 중 한 명인 빌 휴렛의 대답은 그러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 주기에 충분하다.

“3M이 무슨 상품을 가지고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3M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새로 개발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 3M의 매력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품 개발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이 포스트-잇과 아트 플라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특별한 무엇’이다. 그‘특별한 무엇’은 다름 아닌 혁신이다. 3M의 제품들은 바로 이러한 혁신의 산물들인 것이다.

1902년 창립 이래 3M 혁신의 역사를 연 제품인 Three-M-ite와 세계 최초의 방수연마지 Wetodry, 50년대 3M의 황금기를 이끈 Scotchguard 그리고 80년 대의 Post-it까지 3M의 모든 제품들은 혁신의 과정을 통해 개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을 위한 노력은 1940년대 후반 장식 리본을 만들던 부직포 기술이 지난 수십 년의 시간을 거치며 수많은 제품에 응용되고 오늘날에까지 활용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M은 혁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는 회사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제품만을 만들어온 3M이라고 해서 항상 성공을 거듭하는 것은 아니다. 3M을 다른 기업과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혁신성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3M은 이러한 실패에 관대하다. 아트 플라이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위험을 무릅쓰고 제품 개발에 나섰던 데에는 바로 이러한 3M의 문화가 바탕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잘못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독재자와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권위적인 틀에 묶어서 일을 시키는 권위적인 경영이 가져오는 실수보다는, 개개인이 자율적인 환경에서 저지를지 모르는 실수가 장기적으로 덜 심각하다. 실수가 저질러졌을 때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을 짓밟는 경영방식은 기업을 망치는 심각한 요소이며, 만약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개개인으로 하여금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3M의 전설적인 CEO 윌리엄 맥나이트의 이러한 믿음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패에 관대하다는 것은 단순히 직원들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회사를 위해 창의성을 발휘한다면 그래서 예기치 못한 실패를 하게 된다면 아낌없이 박수를 쳐 주고 또 다른 성공 혹은 실패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혁신을 추구하는 것은 동시에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다면 아무도 혁신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에 관대하며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을 독려하는 3M의 문화는 혁신을 위한 또 다른 힘이 되어 주고 있다.


혁신을 지원하는 3M

하지만 회사가 창의적인 기업가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실패에 관대하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새로운 제품 개발에 나서려 할까? 포스트-잇 혹은 다른 제품의 개발 과정을 통해 보더라도 단순히 기업 문화에 전적으로 의존해 혁신과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런 배려나 대가 없이 회사를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직원들은 없기 때문이다.

아트 플라이가 자신의 일이 아닌 접착식 노트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3M의 다양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 15% 원칙을 비롯해 혁신을 지원하는 각종 제도들은 3M의 직원들을 용감하게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에 나서도록 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무 시간에 공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3M의 방침은 대담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3M은 연구직원들이 자신의 업무시간 중 15%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특별 자금까지 지원한다. 비밀 프로젝트 혹은 개인 프로젝트를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제도가 있다. 3M은 이중사다리 방식의 경력관리를 하고 있다. 전문가와 기술자는 진급을 하려면 경영자로 전환해야 하지만 3M의 전문 연구진은 진급에 대한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이중적인 진급체계를 가지고 있다. 위대한 전진 상, 신규 사업 자금, 기술 개발상, 수익배분 조기 실시 등은 3M의 혁신을 자극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혁신 그리고 3M

포스트-잇에 3M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했다. 어쩌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 속에는 3M의 혁신적인 문화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지원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포스트-잇의 사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3M 제품에서 우리의 주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혁신성과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다.

3M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이다. 그리고 그 기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창조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직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단순히 기업 문화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3M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기 위해 마련한 각종 제도와 그것을 위한 노력을 조금만 알 수 있다면 혁신적인 기업 문화와 그것을 지원하는 제도 사이의 놀라운 조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최고의 기업이라고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3M의 명성은 이러한 문화와 제도의 조화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래서 혁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해도 손색없는 3M의 성공은 결코 우연한 산물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포스트-잇에 대한 아이디어는 우연한 것일 수 있지만 만약 아트 플라이가 3M이 아닌 다른 기업에 몸담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접착식 노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도 바닥에 떨어진 책갈피를 줍느라 정신이 없을지도 모른다.

3M은 오늘도 혁신이라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제품은 결코 낡지도 않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우리와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할 수 있는 기업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3M이 그 정답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3M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면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라.

  • 실험적이고 소모적인 일을 장려하라.
  • 처음에는 멍청하게 들리더라도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라.
  • 격려하라, 간섭하지 마라,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을 발전시키도록 배려하라.
  • 만일 아이디어가 좋다면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택하고, 만일 그 아이디어가 좋지 않다면 우리가 그것을 해보니 별볼일 없다는 보험료를 지불하고 안도감을 얻게 될 것이다.
  • 유능한 사람을 고용하고 그들을 혼자 내버려 두라.
  • 만일 사람들 주위에 울타리를 친다면 우둔한 사람들만 남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제공하라.
  • 한 번 해 보게 하라, 지금 당장.

출처: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보 <세계의 기업> 2001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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