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았다. 그들이 이룬 공부의 성과는 놀라웠지만, 그들의 고매한 인품과 공부하는 자세는 성과를 능가했다. 훌륭한 성과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자명했다. 훌륭한 성과라는 열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내가 발견한 뿌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 자득(自得)의 힘.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일당백(一當百)의 공부가 된다.” 명나라의 유학자이자 양명학의 기틀을 세운 왕양명(王陽明)의 말이다. 구본형 사부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스승이 없는 상황이 가장 좋은 스승일 수 있다.” 아마도 스스로 깨닫는 공부의 힘을 강조하신 말씀일 것이다.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자(朱子)는 스스로 깨달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공부는 푹 익어야 하나니, 익었을 때에는 한번 말해주기만 해도 곧 깨닫는다. 만일 익지 않았을 때에는 모르지기 사색을 해야 한다. 사색하여 얻게 되면, 마음은 이미 처음과 같지 않다.” 푹 익어야 한다는 말은 스스로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훌륭한 스승은 쫓아가서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준비된 학생에게 스승은 도처에 널려 있고 한 눈에 보인다.

“불교에서는 ‘원앙새 수놓은 솜씨는 보여줄지라도, 바늘은 남에게 주지 말라’고 한다. 그 뜻은 수놓은 솜씨는 남에게 보여주되 방법만큼은 말해주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리하여 스스로 알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수놓는 방법까지 가르쳐준다면 배우는 자가 깊이 터득하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다.” 성호학파의 창시자인 이익(李翼)의 말이다. 자득이 얼마나 유용하고 중요한지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둘, 마음의 수양이 우선.

서경덕(徐敬德)은 마음을 담은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이 통하게 해준다’라고 했는데, 귀신이 통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통하는 것이다.”

“문을 나서자마자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니, 만일 자기 자신에게 주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올바로 길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주자의 말이다. 뜻이 없는 배움은 공허하여 방황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하기 전에 목적과 뜻부터 튼튼히 세울 일이다.

맹자(孟子)는 학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놓아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 마음을 담지 못하는 공부는 모래성일 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셋, 정성과 인내.

“학문하는 것은 거울을 닦는 데에 비유할 수 있다. 거울은 본래 밝은 것이지만 먼지와 때가 겹겹이 끼이니 약을 묻혀 갈고 닦아야 한다. 처음에는 아주 힘을 들여 긁어내고 닦아내야만 한 겹의 때를 겨우 벗겨내니 어찌 대단히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계속해서 두 번 닦고 세 번 닦는다면 힘이 점점 적게 들고, 거울의 밝음도 벗겨낸 때의 분량만큼 점점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어려운 관문을 지나 조금 쉬운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또 혹 조금은 쉬운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더욱 노력하여 밝음이 완전히 드러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만 공부를 중단하는 사람도 있으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 이황(李滉)의 말이다. 정성과 인내를 갖고 노력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면 가속도가 붙어 더욱 쉬워지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정성과 인내가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 분발하지 않는 제자는 계발해주지 않고, 애태워하지 않는 제자에게는 말해주지 않는다. 한 모서리를 들어서 보여주는데 세 모서리로 응답하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 공자(孔子)의 말인데, 쉬운 말 같지만 뜻이 깊다. 훌륭한 스승을 찾는데도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고 훌륭한 스승을 발견하여 가르침을 얻었다 해도, 정성과 인내가 없으면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볼 일이다.

공부에 대한 말 중에서 주자처럼 핵심을 찌르는 것도 없을 것이다. 다음은 그런 것 중 하나다. “공부라는 것은 비유컨대 배를 저어갈 때 삿대를 잡고 힘을 잘 써야 하는 것과 같다. 공부가 끊어지려는 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아 뒤집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배를 저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물이 잔잔한 곳에서는 느긋하게 배를 저어도 좋지만 여울과 급류에 이르러서는 노 젓기를 완만히 해서는 안 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저어 올라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일보라도 물러나게 되면 배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정성과 인내가 있어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지속될 수도 완성될 수도 없다.


넷, 유연함.

“나는 요즘 퇴계 선생의 문집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혀 공부하고 있는데, 그 정밀하고 가이없는 학문은 참으로 후생(後生)이 감히 엿보거나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상스러운 것은, 이 책을 읽으니 정신과 기운이 느긋해지고 생각이 가라앉아 혈육(血肉)과 근맥(筋脈)이 모두 안정되고 편안해져 예전의 조급하고 들뜬 기운이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책은 나의 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겠는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이황의 글을 읽고 적은 글이다. 정약용과 이황의 학풍은 매우 다르다. 이황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라면, 정약용은 성호(星湖)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정약용은 이황의 학문과 글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그의 유연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연했기에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으며 50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훌륭한 학자와 문인들은 공통적으로 공부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할 것으로 교만과 인색함을 꼽는다. 이익은 교만과 인색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교만이란 기운이 가득 찬 것이니, 가득차면 남을 용납할 수 없다. 인색이란 기운이 부족한 것이니, 부족하면 남에게 베풀 수 없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기학'(氣學)’의 대가인 최한기(崔漢綺)의 말도 마음에 새겨 둘만 하다. “자신의 덕량을 넓히지 못하는 데에는 세 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편벽됨이요, 둘은 스스로 뽐냄이며, 셋은 남에게 이기기 좋아함이다. 편벽된 사람은 한 곳에 구애되고 집착하여 더 먼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조그만 얻음에 만족하여 더 나은 것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기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훌륭하다고 여기므로 마음을 비워 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부하는 방법과 공부하는 마음 둘 다 중요하다. 둘 중 굳이 우선하는 것을 고르라면, 나는 공부하는 마음을 꼽겠다. 마음 없는 방법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것이 튼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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