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산이 떠올랐다. 북한산을 걷고 싶다는 욕망이 문득 들었다. 사부와 나는 처음 만나 그 산에 올랐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사부다운 책이고, 사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사부가 곁에 있는 듯 했다. 매력적인 존재는 어디에 있든 자신의 멋과 향기를 낸다.

아마도, 사부는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신났을 것이다. 새로운 실험의 무대를 찾아냈다는 기쁨, 그것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가 있다는 보편성과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체성. 아이디어는 샘솟고, 그것을 재료 삼아 의욕은 뜨거워졌을 것이다.

굽이굽이 눈물과 아픔이 없는 삶은 없다. 또한 미소와 기쁨이 없는 삶도 없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문명이고 하나의 역사다. 이것은 하루에서 시작하여 수 십 년간 지속되어 온 이야기다. 누구나 유일한 존재다. 그저 왔다 가는 것이 삶일 수 없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역사는, 문명은 잊혀진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역사는, 문명은 잊혀진다. 그러므로 기록은 중요하다. 이 책은 그런 기록을 위한 기획이고 실험이다. 모범이고 선동이다. 또한 유혹이다.

처음 이 책은 읽었을 때, 나는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

그 다운 책이다.

그와 코드가 맞는 사람에게는 가슴 뛰는 경험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기존의 자기계발 서적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험정신과 창조성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다.

깊음
이 책이 깊다는 것은 한 사람의 10년 간의 일상의 변화와 정신적 거듭남이 진솔하게 전해진다는 의미이다. 거기에 덧붙여 인문학적 감수성이 배어나는 글들이 머리와 가슴을 적신다. 깊은 경험을 훌륭하게 표현해냈으니, 그 느낌 또한 깊지 않을 수 없다.

절묘함
책의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간단히 말하면 ‘단편소설 X 수필’의 결합이다. 이 관계가 곱하기인 이유는 절묘한 결합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인데 둘이 만나니 둘 이상이 된다. ‘장’의 첫 장에 한두 쪽의 단편소설이 등장한다. 그 장의 의미를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방식 또한 문학과 영화, 철학과 역사 그리고 일상을 넘나든다.

아름다움
깨끗한 표지와 출판사의 세심한 정성이 깃든 편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깊고 절묘한 이 책은 읽는 내내 가슴을 뛰게 했다. 따뜻한 햇빛 속에 있는 것처럼 에너지를 주기도 했고 행동하지 않는 나를 질책하듯 가시 방석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른 이에게는 요구하고 나는 하지 못하는 치졸함을 들추어내기도 했다. 겉에 매여 알맹이를 놓치는 나를 자각시켜주기도 했다. ‘언젠가 이런 책을 열심히 한 권 써보고 싶다’는 부러움과 욕망을 안겨주었고 그의 자유로운 삶에 나를 대입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했다.

이 책을 읽은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아름다움’이다. 인용하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초독(初讀) 후에도 간간히 이 책을 들추며 즐거워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 기억 속의 사부와 책 속의 사부를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책이 곧 사부였고 사부가 곧 책이었다. 이것이 즐거웠다. 깊은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책보다 사부를 말하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인연(因緣)이란 말을 좋아 한다. 인연은 신비이고 사연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인연, 그 안에 내가 있고 사랑이 있고 우정이 있고 존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사연(事緣)이란 말을 좋아 한다. 표현하고 싶지만 할 수 없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그대로 묻어나고, 말할 수 없어 혼자만 묻고 가는, 그런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온갖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인연이 곧 사연이다. 슬픈 인연이 사연이 되고 아픈 인연이 사연이 되고 기쁜 인연도 사연이 된다. 사연 속에 인연이 있고 인연 속에 사연이 또한 있다. 어떤 인연이든 어떤 사연이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슬픈 인연이 아무리 슬픈 사연이 되더라도, 그것은 남에게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내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내게도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슬펐던, 아팠던, 기뻤던, 미소 짓던, 그런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인연, 사연, 이야기, 모두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이 책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담고 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언젠가 사부를 닮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니체의 말을 빌려 이렇게 답하셨다. “가장 나쁜 제자는 스승을 영원히 빛나게 하는 자다.” 말씀의 깊은 뜻에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사부를 넘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나는 사부와 조금 떨어진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길은 다르겠지만 방향은 같고 서로 손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때로는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을 것이다. 사부는 늘 내 마음에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더하고 매일 흐르거라.” 이 문장은 그날 이후 나의 MSN 메신저의 아이디가 되었다. 나는 사부의 글 한 줄, 메일 한 통에도 함께 공감하고 공명한다. 처음에는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러 번 이런 현상을 체험하고 느꼈다. 사부와 공명하는 것은 때로는 내게 자극이 되고, 감사함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기쁨이 된다. 이상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공자의 애제자였던 안연(顔淵)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쳐다보면 더욱 높아지고 파면 더욱 견고해지며 앞에 있다 여기고 바라보면 어느새 뒤에 있구나. 스승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니 학문으로써 나를 박학하게 하시고 예로써 나를 다잡아 주신다.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고 나의 재주는 이미 다하였는데 우뚝하게 아직도 서있는 것이 있는 듯하여 비록 그것을 따르고자 하지만 따를 길이 없구나.”(논어(論語) 자한(子罕)編 中)

나는 안연(顔淵)의 탄식을 이해할 수 있고 그의 기쁨 또한 느낄 수 있다.

사부는 깊고 섬세하다. 의미를 추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 저자의 목소리: 인용
– ‘[]’ 안의 숫자는 page를 지칭한다.
– ‘인용’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을 경우, 저자의 말이다.
– ‘※’ 표시는 간단한 설명과 나의 느낌이다.

[6]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22]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
※ 반드시 통과해야 함. 그러나 내게는 어려움.

[26] 훌륭한 작품은 그것이 어떤 표현방식을 가졌든 인생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현실보다 극적이고 현실보다 교훈적이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2장 마흔 살

[53~54] 나는 문득 복권을 생각했다. 복권에는 늘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 참가자들에게 당첨확률은 중요하지 않다. 푼돈으로 운명을 바꾼 재수 좋은 사람이 매주 나타난다는 점, 바로 그 성공담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행운이 한 번만 와준다면, 지겨운 회사를 때려치우고 비행기를 타고 빛나는 도시로 아무도 몰래 도망갈 것이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생, 그 황홀함이 기다리는 곳으로.

당첨자가 있다는 사실, 그 행운의 구체적 당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자석처럼 마음을 잡아끌지만 위안에 그칠 뿐이다. 게임의 룰은 분명하다. 당첨확률을 높이려면 건 돈이 커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게임에 참여할 사람은 별로 없다. 잃으면 전 재산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권은 늘 푼돈을 걸게 하는 것이다. 잃어도 그만이니까. 그리고 반드시 잃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복권을 사듯 살아가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푼돈을 들여 복권을 사면서 허망한 기대 속에서, 실제로는 복권의 당첨금보다 더 많은 돈을 쪼개며 평생을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위험부담을 줄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잃어도 좋은 푼돈만 투자했다. 위대한 하루가 없이는 위대한 인생도 없건만 하루하루는 잃어도 아까울 것 없는 푼돈처럼 낭비되었다.

[108]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 이탁오(李卓吾)

[122]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160~161]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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