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고전(古典)이란 ‘누구나 읽었기를 바라지만 읽기는 싫은 책’이라고 했다. ‘강의’를 읽으면서 염두에 둔 것은 가장 가슴에 끌리는 고전 한 권을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이 책에 나온 모든 고전을 다 읽고 싶어졌다. 그래도 순서를 정한다면, 맹자(孟子)와 한비자(韓非子)를 먼저 읽고 싶다. 맹자에 매혹된 이유는, 첫째 글이 ‘논리적’이고, 둘째로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비해 ‘사회적’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 넓게 접할 수 있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경우는 미래사관(未來史觀)과 변화사관(變化史觀)으로 대표되는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고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신영복이 한비자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 인간적임을 강조한 것도 한 이유다.

마음에 드는 고전을 발견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설정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여러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신영복이 고전으로 현대 사회의 행태와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는 감탄했다. 그의 비판은 때로는 칼처럼 날카로웠고, 어떤 때는 가위처럼 단호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부딪침’에 비유했다. 부딪침은 ‘관계’ 없음(無)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긴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일회적인 화폐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전에 나오는 잘못된 정치와 ‘난세의 징조’는 현대 사회의 그것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았다. 이런 깨달음 또한 즐거움이었다.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1장과 11장이었다. 대가의 숨결과 통찰력을 바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함은 내 능력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가 대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가의 공통점 중 하나는 ‘명백한 전문성’이고, 이러한 전문성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증명된다. 이것은 말발이나 글발과는 다른 것이다. 대가는 핵심을 꿰뚫는데, 핵심은 단순한 것이기에 대가에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부차적인 것이다. 표현 방식은 양념이고 포장이다. 적당히 잘 버무리고 맛스럽게 담으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는 정도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핵심이고, 양념이나 포장이 핵심을 담지 못하면 부실해질 뿐이다.

1장 서론에서 저자는 고전 강독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시대에 연결한다는 것이다. 고전 강독에는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이고 ‘과거는 오래된 미래’다. 놀랍게도 신영복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역사 속의 영웅들(Heroes of history)’에서 윌 듀랜트(Will Durant)가 보여준 것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는 듀랜트의 말과 ‘미래로 가는 길은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영복의 관점이 내게는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듀랜트와 신영복은 철학(사상)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사함을 보여준다. ‘역사를 쓰는 철학자’로 불리길 원했던 듀랜트는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신영복은 동양 사상은 인문주의이고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고 말한다. 이해와 받아들임, 이것은 존재론과 관계론 중 어디에 가깝나? 내가 보기엔 분명히 후자다.

둘째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에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이다. 화두는 방향이고 중심이다. 방황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지만, 길을 잃지는 않는다. 도(道)가 ‘길을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면, 화두는 길의 방향이고 생각의 중심이다. 신영복이 내걸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왜? 동양 사상은 인문주의이고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지속적인 만남이고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관계론이 동양사회와 사상의 정수라면, 서양사회의 핵심은 개별적 존재의 실체성과 그것에 대한 강조, 바로 ‘존재론(存在論)’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전 강독의 의의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고, 고전 강독의 관점과 재료는 ‘동양의 관계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11장 ‘강의를 마치며’에서 전하는 몇 가지 당부를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 온고창신(溫故創新).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오늘의 주체가 되어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창신(創新)의 장(場)’을 시작할 것, 그리하여 내일을 밝게 할 것.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나아갈 것. 동양고전의 내용보다 동양고전에서 얻은 ‘성찰적 관점’을 중요시 할 것.

* 가슴과 실천. ‘가슴’이야말로 ‘관계론의 장’이라는 점.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하며, 그 이유는 ‘감성과 인격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점. ‘실천된 사상만이 나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 것.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는 것.

* 좋은 사람, 좋은 사회, 좋은 역사.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가슴에 새길 것. 이것 하나는 지금 바로 새길 것.

책의 소제목 중 하나인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를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관계를 존중하고 도(道)를 소중히 하고’, 이 책의 메시지를 감히 이 한 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 저자의 목소리: 인용

– ‘인용’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을 경우, 저자의 말이다.
– ‘*’ 표시는 간단한 설명과 나의 느낌이다.

[21]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123]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야 하는가…
[124] …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
* 희망이 필요한 시기, 희망이 빛이 되어 주는 시기는 좋은 상황이 아니라 고난에 처했을 때이다. 희망은 밝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고난 극복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희망이다.

[129]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30]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절실함이 변화의 첫 번째 조건이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 손이 또 무릎으로…

[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243]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512~513]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두리웠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逕人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 유종원(柳宗元), 강설(江雪)
* 생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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