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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찬 IBM

1911년부터 판매점원이 사용하는 저울과 타뷸레이팅 기계 등을 제조하던 직원 수십 명의 소기업 CTR은 1925년 세계적인 기업을 꿈꾸던 토머스 왓슨에 의해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류 기업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기록들을 남기게 됐다. 과거 생산성 향상의 혁신을 가져왔던 PC 시대의 표준으로, 현재는 e-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자로 이름을 남긴 IBM은 그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승자는 아니었다.

1914년 파산의 위기와 30년대 대공황의 거센 파고가 IBM을 괴롭혔으며, 80년대 PC 혁명은 90년대 초반 IBM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IBM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인터넷 시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회생 불능의 상태로 미국 시장경제의 몰락을 상징하던 IBM이 시련을 이기고 또 다시 세계 정상의 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된 힘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최고경영자와 조직구성원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전진

초기 IBM을 이끌었던 토마스 왓슨과 그 아들 왓슨 2세는 기업 경영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직원들과 함께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IBM의 신념은 1956년 왓슨 2세의 취임식에서 공식화되었으며 이후 IBM의 성공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그들의 신념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첫째 개인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고, 둘째 고객에게는 가능한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며, 셋째 탁월하고 완전한 업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IBM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은 이 신념을 바탕으로 기념비적인 성과들을 이끌어 냈다. IBM의 탁월한 영업방식과 영업 사원을 교육하던 방법들, 그리고 최상의 고객서비스와 기술은 그들의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IBM은 자신들의 신념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조직이 거대해지고 관료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신념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세부방침과 세부절차, 조직체계 그리고 관행을 중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IBM은 흰색셔츠와 푸른색 양복을 입은 조직화된 군대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社歌 ‘중단 없는 전진’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존경받는 최고의 기업에서 파산직전의 기업으로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의심의 여지없이 IBM이었다. Fortune이 선정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에 4년 연속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IBM의 방식(The IBM Way)’은 모든 기업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들의 영업방식과 인사제도는 수없이 많은 책들로 출간되었고, 대학 강단에서 강의되었으며, 모범사례의 전형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80년대 말 조금씩 삐걱거리던 IBM은 90년대 초반까지 불과 3년간 150억 달러의 누적 손실과 기업가치 700억 달러 감소라는 오명을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미국 자본주의의 몰락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 충격이 컸다.

이런 IBM의 실패를 재촉한 가장 큰 원인은 자사의 메인프레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장전략에 있었다. 개방형 시스템을 대표하는 Unix라는 대세를 거스르고 오직‘자신들만의 길로 가려 했던 것이 결정적인 실패 요인이 됐던 것이다. 또한 IBM이 자랑하던 고급 핵심인력을 조직 내에 붙잡아 두지 못한 채 EPS와 앤더슨 컨설팅 등에 빼앗기고, 80년대 아웃소싱 정책변경으로 키우게 된 Intel과 Microsoft의 약진을 막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IBM은 그들의 고객과 멀어져 가고 있었으며, 유연하고 강하게 결합되어 있던 내부 조직은 권력다툼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초기 경영자 왓슨과 왓슨 2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이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IBM 영업 직원들은 이전처럼 고객의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해 주지도 못했고, 의욕과 열정에 넘치던 조직구성원들은 회사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진부한 일상에 찌들기 시작했다. 잘못된 의사결정이 반복되었고, 그렇게 무너져가던 IBM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한 채 구석기 유물이 되고 말았다. IBM이 메인프레임을 그토록 고집했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IBM은 새로운 경영자와 신념에 찬 직원들로 인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CEO 루 거스너

IBM은 1994년 기업 회생을 위해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경영자를 영입하게 됐다. 그만큼 생존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이다. 그런 기대와 책임을 한 몸에 안고 CEO가 된 사람은 루 거스너(Lou Gerstner)였다. 맥킨지의 스타 컨설턴트였고, 신용카드회사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 그리고 담배, 쿠키를 만들던 RJR/Nabisco 등 주로 서비스업에 몸담았던, IBM이 속한 업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IBM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빠르게 행동하는 기업을 원했다. 거대한 IBM은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직원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동안 고객들에게 잃은 신뢰를 되찾기 위해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오만했던 IBM이 고객서비스를 제일의 가치로 생각하는 기업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IBM의 가장 큰 변화는 메인프레임을 비롯한 하드웨어 부문을 축소하고 서비스부문을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1996년 독점금지법이 풀린 것을 계기로 서비스 자회사였던 ISSC를 해체하고 메인프레임에서 PC, 소프트웨어, IT 인프라 등의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8년 말까지 1만8천 개의 컨설팅 계약을 성사시키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IBM은 더 이상 덩치 큰 하드웨어를 파는 기업이 아닌 해결방법(Solution)을 파는 빠르고 유연한 기업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직원들

또 다른 변화가 기업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루 거스너가 원했던 것처럼 그리고 IBM의 모토처럼 직원들 스스로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직된 조직에 익숙해진 직원들을 기업혁신의 중심으로 이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미 암울한 기업의 미래에 낙담했으며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에 따라 과거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IBM의 독특한 문화와 교육제도는 그들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게 해주었다. 게다가 새로운 최고경영자 루 거스너는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해 주는 사람이었다.

IBM의 e-비즈니스 혁명을 이끈 주역인 존 패트릭과 데이비드 그로스만은 스스로 생각하는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인터넷이‘이제껏 존재해온 기업내부와 외부를 잇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수단’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비공식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후‘Get Connected’라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기업의 임직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IBM의 임원들은 여전히 완고했고 변화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의사결정자들과 접촉하는 경로를 단축하는 것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직접 루 거스너를 찾아갔고 자신들의 신념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1996년 가을, 루 거스너와 패트릭의 상사였던 어빙 라다스키 버거 박사는 IBM의 포스트 전략을 e-비즈니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IBM의 또 다른 성공의 열쇠인‘e-비즈니스’는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었던 직원들과 그들에게 의사소통의 문을 열어 두었던 루 거스너라는 최고경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로 인해 치밀하게 세웠던 계획과 목표가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잘 짜인 계획과 목표보다는 올바른 길을 밝혀줄 신념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업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다.

표면적으로 IBM이 다시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의 e-비즈니스 전략과 서비스 기업으로의 변신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고객서비스의 중요성을 잘 아는 루 거스너가 없었다면, 또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직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IBM이 있었을까? IBM의 기업 전략과 그들의 계획이 또 다른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 근본적인 곳으로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루 거스너와 그의 직원들은 초기 IBM을 일구어 냈던 사람들이 지키고자 한 신념을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따랐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으며 고객을 소중하게 여겼고 이를 통해 완전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공의 방법은 너무도 쉬운 곳에 있었다. 그들이 신념을 지키는 한‘중단 없는 전진’은 계속될 것이다.

 출처: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보 <세계의 기업> 2001년 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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